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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 여름, 나는 그곳에. -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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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 여름, 나는 그곳에. - 2

솔잎사이다 2018. 1. 3. 20:22


 그렇다면 어째서? 

 의문을 품을 찰나, 순간 눈 앞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앗."

 눈을 깜빡이니, 따뜻한 빛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물냄새가 나를 맞아주었다. 돌아온 것이다.

 햇볕이 곧장 내리쬐는 바위에 앉은 그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까르르 웃고있었다. 얼떨떨해져 멍청히 선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그녀는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 내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동작이어서 감탄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재밌었죠?" 

 "아, 네...."

 "그럼 다음엔 뭘 하고 놀까요?"

 "글쎄요...."

 그것이 그녀 나름의 놀이였다면, 글쎄. 정말 글쎄다. 나로썬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배꼽시계가 울렸다. 11시 50분이 되었다는 신호다. 나름 근무조건이 괜찮은 회사에 있어서, 아는 사람과는 달리 식사를 제때 챙겨먹는 편이라 꽤 정확히 울린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배에서 신기한 소리가 나던데." 그와는 별개로 그녀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시리 민망해져서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들떠있었다. 사촌동생에게 겨드랑이와 손바닥으로 방귀소리를 들려줄 때와 같은 몸짓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쩐지, 그녀에겐 이 소리가 신기하고 재밌는 모양이었다.

 "다시 들려줄 수 있어요?" 

 그러더니 귀를 갑자기 내 배에 들이댄다.

 "왁! 뭐하는 거에요?"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 허리와 배를 잡고 놔주질 않는다. 그 행동에 악의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이거 참. 이 아가씨는 사람 그 자체를 잘 모르는 건가?

 "놔 주면 얘기할게요." 그러더니 곧장 놓아버리고, 내 앞에 서 대답을 기다린다. "그냥 배가 고프면 이럽니다. 항상 이러죠."

 "배가 고프다니요?"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않는다. 장난인지 아닌지 더욱 아리송하다. "그러니까, 뭔가 먹어야한다는 겁니다."

 미국 영화에서 원주민과 소통하는 장면처럼, 나는 손을 입에 가져가는 몸짓까지 흉내내가며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뭔가 알겠다는 듯 눈으로 웃더니, 나무를 향해 손을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빈 나무에서 여러 색의 열매가 잔뜩 맺히더니, 그녀의 손으로 두 알이 날아가 안착했다. 붉은 것과, 흰 것. 무슨 과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과육이 적당히 단단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좋아보였다. 

 그녀가 과일을 내밀었다.

 "둘 다 드세요." 

 "안 드세요?" 

 "전 괜찮아요." 

 좀 의아했지만, 거절하는 눈매로 보아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일단 호의를 베풀었으니 거절하면 안 되겠지. 우선 붉은 것부터. 

 "어?"

 한 입 베어문 나는 조금 놀랐다. 즐겨마시는 과채 음료와 똑같은 맛이었다. 자연적인 과일의 맛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그 맛. 구연산과 설탕을 함뿍 머금은, 그런.

 하얀 과일도 다른 제품을 연상케하는 걸 제외하면 비슷했다.

 "꽤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그러더니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웃었다. 난 먹다 말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방금처럼 노는 것보다 먹는 걸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사실, 그렇습니다."

 나도 웃었다. 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일터에서도 식사 시간을 제일 좋아하고, 요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전부 먹는 방송이고, 영화보다도 저녁 찬거리를 고를 때 더욱 고민하니까. 정말 정확하게 짚은 셈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동물원 곰이 사과 씹는 모습을 보는 어린 아이 같은 시선이 계속 쏘아지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따금 배시시 웃는 것이, 그녀에겐 내 식사 모습이 정말로 동물원의 그것과 같은, 작은 유희인 것 같았다. 말하기도 좀 그렇고. 

 먹으면서 찬찬히 대화 좀 해보려고도 했지만, 지금으로썬 대화꺼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얼른 먹어치우는 게 제일인 것 같았다. 비버가 나무 밑둥 파먹는 마냥 삭삭삭삭 먹어대자, 그녀는 뒤로 넘어지지만 않았다 뿐이지, 정말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다 먹고 나니 허기가 좀 가셨다. 주변을 두런두런 살펴봤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몸이 말하는데, 사실 이런 건 그냥 땅에 버려도 되잖은가. 

 '이러면서 껍질 깎을 칼을 찾지 않은 게 용하구만.'

 내가 휙 버리자 그녀는 쪼르르 달려가 과일 찌꺼기를 발로 꾹 밟아 부드러운 땅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왔다.

 "이제 뭐하고 놀까요?"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했다. 마침 산에 왔으니, 등산을 하는 게 좋겠다. 사장님 비위맞추면서 오르는 것이나, 정상에 가서 인증 사진 찍고 훌렁 내려오는 거 말고, 산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산의 풍경과 바람을 느끼는 그런. 여태 산을 가면서도 산을 즐기는 건 불가능해 아쉬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까. 

 "등산 어때요?"

 "등산이요?"

 고개를 갸우뚱거리진 않지만,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건 표정만으로도 전해졌다. 다시 설명했다. 

 "산을 천천히 돌아다녀보는 건 어때요? 꼭대기로도 올라가 보고."

 "그런 건 재미없잖아요."

 순간 그녀도 사장님을 따라다녔을까하는 장난스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냐, 어쩌면 산신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산 꼭대기까지 가면 피부도 타버릴 테고요."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말까 순간 고민이 됐다. 정맥이 비쳐보이는 깨끗한 피부-생각해 보니 이 표현, 조금 무서운 표현 아닌가?-를 보면 진담으로 생각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