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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 여름, 나는 그곳에. - 1 본문

단편/기타

[단편] 그 여름, 나는 그곳에. - 1

솔잎사이다 2018. 1. 1. 02:33

 간밤의 꿈에 적셔진 태양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생각을 깨운다. 나는 잠에 취한 걸까, 꿈에 취한 걸까. 아무래도 꿈은 아닐 것이다. 그래. 꿈은 아닐 것이다.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버스에 오르면, 나는 창가에 앉는다. 운이 좋은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나오는 정거장이 주택가와 멀어서 그런 것뿐. 

 앉아서 잠을 쫓아내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비눗물과 함께 씻겨내려 간 줄 알았던 생각들이 시야를 가린다. 그건 입사 기념으로 기울였던 술잔이기도 했고, 거절의 말이 담긴 분홍색 편지지이기도 했고, 플라스틱 방패를 엷게 비추는 촛불이기도 했고, 어머니의 손에 걸린 동전보다 작은 손가락이기도 했다. 

 그 궤적들은 멋대로 범람하여 땅을 덮는 강물과 같은 것이어서, 생각의 물꼬를 돌려도 물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써 눈으로 창밖을 훑으며 잊으려 하여도, 이따금 바늘처럼 옆구리를 쑤셔대는 기억엔 당할 도리가 없어, 저도 모르게 입으로 된소리가 새어나오게 한다. 시선 없는 주목에 숙어지는 고개는, 꼭 긍정하는 모양새다. 

 매일 이렇다. 항상 이렇다. 이것 또한 인생의 수레바퀴의 한 축을 도맡고 있다. 나는 이럴 때면 눈을 감는다. 떨어뜨릴 수 없다면 가만히 눈을 감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다. 잠시 눈을 감으면 세상은 없다. 오로지 소리와 감촉뿐이다. 

 시야 없이 맞이하는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것을 담배보다도 깊은 버릇으로 지니고 있었다. 삶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 같은 그 은밀한 쾌감은 나를 인간으로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자, 그리고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같은 건물들의 짙은 그림자와 사람의 마찰음과 함께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하여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진 제품처럼 줄지어 가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어야 하는데 버스는 텅 비었고 창밖은 산과 논밭뿐이잖아!

 아무래도 깜빡 졸게 된 모양이었다. 전화를 꺼내어 보니 회사의 사수에게서 전화만 여섯 번 와있었고, 벌써 출근 시간은 두 시간이나 넘겼다. 손이 저절로 얼굴을 덮는다. 하지만 한숨은 나오지 않는다. 

 손톱이 공연히 전화를 톡톡 두드린다. 걸까 말까. 초점 없는 눈은, 풀의 바다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부저를 눌러두었다. 어디라도 좋으니, 우선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버스는 그늘에서 멈추어, 요란하게 트림했다. 기사는 문을 열고 그대로 누워 모자를 얼굴에 얹어두었다. 시동을 끈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가 종점인 모양이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만 멈추고 말았다. 살을 찢고 비집고 들어오는 듯 강하게 찌르는 햇살. 높다랗고 넓게 뻗은 나무가 만든 그늘. 장기판과 노인 둘을 얹고 버티는 나무 앞의 평상. 정돈되지 않은 화단을 울타리 삼은 초등학교. 만듦새가 어설픈 간판을 단 사진관. 그 사이에 끼어 초라하게 낡아가는 이발소. 눈동자에 풍경이 담길수록 가슴 속 진공관의 울림은 커져만 갔다. 

 이 풍경에 걸맞는 단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영화 속 한 장면?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 안타깝게도, 나름 대학물 먹었다는 이 머리는, 레포트는 쓸 줄 알아도 이런 풍경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 오감은 지금 이 시간에 자리한, 나만의 것이다. 나눌 수도, 보관할 수도 없다. 정작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 이전에, 황홀감에 젖어있을 뿐이었다.

 순간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버스를 돌아보았다. 버스의 번호를 외워둔다면, 언제라도 다시 와 이 감각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버스는 없었다. 왜인지 몸이 떨렸다. 

 부르르 진동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전화 또한 그랬다. 그래. 이제 전화를 걸어볼까. 그런데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 켜보니 배터리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어럽쇼. 분명 아침만 해도 완충 상태였는데. 가방을 보아도 충전기도 보조 배터리도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건 전기보다 따가운 된 소리뿐. 전기는 없었다. 이제 나는 혼자다. 완벽히 혼자다.

 '어디 충전할 곳은 없나?'

 이런 시골엔 편의점이 없겠지? 그런데 찾으려고 뒤를 돌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편의점. 늙은 건물들 속에서 홀로 선 편의점. 홀로 때 묻지 않은 깔끔한 모습을 한 편의점. 시멘트로 몸을 꽁꽁 여민 건물 틈에서, 유리 벽을 입어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편의점. 

 들어가서 충전을 부탁했다. 한 시간에 이천 원. 바가지다. 회사 밑 편의점에선 한 시간에 천 원이었는데.

 어찌되었건 부탁하고 나오니, 그대로 멍청히 서있었다. 

 막막했다. 내게 지금 남은 일은 기다림뿐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이들은 일터에 있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쩐지, 내 신세가 꼭 부러진 못 같았다. 집 안 액자엔 필요없지만, 고물상엔 필요한, 그런.

 그때였다.

 "잘 오셨어요."

 여성의 목소리. 내 또래의 목소리지만, 어쩐지 아이처럼 순진한 데가 있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상담원이나 점원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훈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운 옛사람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 때나 나오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는 들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놀아요." 

 계속해서 들리지만, 어디서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자 비스름한 것이라면 환하게 잎을 피운 꽃 외엔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걸 봐선 내가 잘못 들었거나, 다른 사람 부르는 것을 착각한 모양이었다. 

 양 손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잠깐이지만, 옛 희극의 인물 꼴로 멍청히 두리번거렸다고 생각하니 몹시 무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날도 더운데, 나도 그늘에서 쉬어볼까? 그런데 그늘을 보니 수염도 머리칼도 하나 없는 노인이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왜지?'

 나는 의문을 품자마자 움직였다. 나보다 직급이나 나이가 높은 사람에게는 의문보다 행동이 앞서야한다. 그것은 삶이 내게 프로그래밍해준 중요 코드였다.

 노인이 말했다. 

 "젊은 양반. 더운 데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아, 네. 그냥 좀."

 민머리 노인은 허허 웃더니 평상 한쪽을 툭툭 두드렸다. 

 "날도 더우니까, 볕 쬐지 말고 여기서 쉬어요."

 "감사합니다."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앉았다. 

 "홀렸군."

 입은 한복보다도 더욱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또렷하게 말했다. 순간 아까의 그 소리가 떠올랐다. 그걸 말하는 건가? 이 노인은 그걸 아는 것인가?

 민머리 노인이 답했다

 "그래. 홀린 것 같아 불렀어."

."홀리다니요?" 수염 노인이 맞장구치듯 한 수 두었다. "외지 사람들은 여기 오면 한 번씩 홀리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실례지만, 어떤 걸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눈."

 수염을 기른 노인은 풀빛 왕을 한 칸 움직였다.  

 "홀린 사람들의 눈은 그렇지." 민머리 노인이 거들었다. "그래. 그래."

 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했다. 갑자기 불러놓고 무슨 말인가. 아니, 그것만큼이나 나를 당황하게 하는 건 나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나의 눈을 홀린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홀린 사람의 눈이라!

 오래되어 빛을 잃은 렌즈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런데 홀렸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의 머리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귀신 외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노인 둘은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기는 커녕 다시 장기에 열중이다.

 장기판을 보니 붉은 염료로 칠이 된 포는 민머리 노인의 손가락에 잡히어 풀빛 말을 눌렀다. 차도 포도 없는 초나라는 이젠 말조차 잃고 말았다. 판을 보니 붉은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이 이제 민머리 노인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내만 해주고 바로 오지."

 수염을 기른 노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나무처럼 가만히 있었다.

 "자, 따라오쇼."

 "네."

 민머리 노인이 가는 곳은 학교 뒤꼍에 있는 산이었다. 등산로도 없는 데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모양인지 풀이 무성하게 자라 매우 곤란한 곳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경사가 완만해 오르기 쉬웠다는 것이었다.

 "그래, 여긴 어떻게 왔수?"

 "저, 그게......."

 나는 그걸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말을 입 속에서 두어 번 골라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그냥 대충 말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여기였습니다."

 노인의 탄력 없는 폐가 힘차게 움직였다. 

 "다들 그래요. 깬 상태로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그렇군요."

 앞서 풀을 꺾으며 길을 터주는 노인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이때 무언가 묻긴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아까 그 여인의 목소리를 묻는 게 좋겠지? 홀렸다는 건 아마 그걸 말하는 걸 테지.

 "저, 그런데 홀린다는 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생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노인의 입술이 꿈틀였다.

 "홀린 게 홀린 거죠. 뭐."

 '산을 왜 산이라고 부릅니까?' 하는 말에 답하는 투였다.

 "접해봐야만 아는 걸 설명하는 건, 정말 어렵단 말이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홀린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건 아직도 귀신뿐이었지만, 햇살을 머금고 저마다의 색을 뽐내는 풀들을 마주하니 그런 생각은 녹아내렸다. 

 노인은 산 중턱의 물웅덩이 앞에서 멈췄다.

 "다 왔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잠시만요. 여기서 뭘 하라는 겁니까?"

 하산하는 노인을 불러 세우고 물었다.

 "기다리면 알게 될 거요."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기다림 없이 산 사람처럼 왜 그래요. 그냥 기다려요."

 노인은 그렇게 내려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무얼 기다려야 하는 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기다리는 동안 할 것이 없어 눈을 갓 뜬 아이가 그러듯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 한 몸 들어가기에 적당한 크기의 물웅덩이. 주변을 덮은 수풀. 가지와 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포근함. 모든 것이 내가 살던 곳과는 달랐다. 오랜만에 여기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오셨네요."

 그 목소리!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거기에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소리를 비롯해 외양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밝은 머리카락은 분명 포근한 감촉이리라. 

 "천천히 부르려고 했는데, 어르신이 보내주셨네요."

 부드러운 말씨에, 아쉬움이 한 두 방울 정도 섞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혹시 저를 부르신......."

 "맞아요."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옷을 살짝 집었다. 가까워지자, 쌉쌀한 풀의 향기가 담긴 숨결이 쇄골을 타고 흘렀다. 나도 모르게 호흡을 꾹 참아 멈추게 되었다.

 "놀기 전에 우선 피로를 풀어드릴게요."

 무어라 묻기도 전에 손은 내 옷을 천천히 벗긴다. 말리고 싶었지만, 맞닿은 살의 부드러운 감촉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져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알몸뚱이는 조심스레 쥐는 팔에 끌려 물웅덩이에 담겨졌다. 

 머리가 물속까지 잠겼지만, 어째선지 눈을 뜨는 것도 호흡하는 것도 땅 위와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호흡할 때마다 몸이 가뿐해지고 기운이 나는 것이었다. 

 몸의 모든 오물을 게워내는 느낌이 들었다. 속에서 불컥불컥 뜨거운 것들이 떠나가고, 시원한 물의 촉감이 내 속에 차들어갔다. 하지만 물은 더없이 깨끗했다. 

 물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손은 나를 가볍게 들어 물밖으로 띄운다. 나는 밖으로 나왔을 때 무척 놀랐다. 나의 피부는 햇볕에 잘 말린 것처럼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옷을 입으려는데, 손이 조용히 다가와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 다음 순간 나는 놀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피부에서 옷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새 것 그대로의 감촉이었다. 그렇게 옷이 입혀졌다. 그러고 나서 손은 내 손을 감싸듯 쥔다. 

 "이제 놀아요."

 미소가 천진난만하다. 손에 힘을 주어 그 손을 꼭 쥐었다. 어쩐지, 나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만약 놓게 된다면 나는 이대로.......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너무 놀라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었다. 

 "보세요."

 손이 하늘을 가리킨다. 힘겹게 눈꺼풀의 장막을 거두자, 나 자신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낮인데도, 온 하늘의 별자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나의 오감은 그 풍경 외의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바람소리 속에서도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잠시 빌릴 게요."

 '무엇을?'

 내 가슴에 포근하고도 봉긋한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더니 그것은 점차 내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빌리겠다고 한 것이 내 몸뚱이였나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후회는 않으실 거에요."

 입술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오르는 느낌도 없는데, 점차 아래의 풍경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시야가 검어졌다. 눈이 아래를 향하자, 발톱보다 작은 지구가 보였다. 지구는 이내 작아지다 사라졌다. 몸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놀랍지가 않았다. 이것이 실재함을 알아도, 가슴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고작 이것을 위해서?'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