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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생대리출석사무소 - 1

솔잎사이다 2016. 10. 9. 18:54

 햇빛이 머문 자리에 달빛이 앉는 것처럼, 낮의 분주한 발자국이 아득한 시간 너머로 사라진 밤의 거리엔 저마다의 발이 채우고 섰다. 치킨집 앞에서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사람들, 윤락업소 앞을 지나가며 책을 읽는 청년, 서점 앞에서 빵을 씹는 사람, 인도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 차도에 쓰러져 자는 사람. 그것이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여 빛을 내는 가로등이라 하여도, 빛을 내지 않는다 말할 순 없다. 그래. 그럴 순 없다.

 발을 멈추고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구부정한 목 앞에서 책을 치우면 내 목은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사람에게 조아리는 목이 될 것 같아서.

 황급히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내 시야에서 희고 반드르르한 그녀를 빼앗고 누런 바닥을 주었다. 책은 물웅덩이에 빠졌다. 그 괴한은 이미 지나갔고, 화는 완전히 꺾여버린 배관에서 나오지 못하는 물처럼 신음할 뿐, 일어서지 않았다. 왈칵.

 나는 발 닿는 건물로 바로 들어가 눈물을 씻었다. 눈물이 계속 고이는 까닭은 그저 재수 없는 일을 겪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텅 빈 눈을 지린내와 락스 냄새가 채워서일까. 알 수 없었다. 

 눈물을 씻고 나자 세면대에 엉성하게 붙은 것이 보였다. 작은 스티커다. <인생, 대신 살아드립니다>. 전화번호는 없다. 약도 같은 것도 없다. 의미에 접근할 단서도 없다. 그런 걸 적을 공간조차 없다. 어설픈 스티커. 의미도 애매한 스티커. 그래도 나는, 너에게 코웃음 치지 않아.

 내가 밖을 나왔을 때, 거리는 짙은 안개에 잠긴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담배처럼 모두 타들어 가 연기만 남았다는 듯. 아무것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나온 건물조차 없었다. 위치를 짐작해 걸어 들어가도 매한가지였다. 적어도 여기서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스팔트 바닥과 가로등 불빛의 나열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용감하거나 해서는 아니다. 어째선지, 내겐 지금의 이 일 자체가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길처럼 죽 뻗은 빛을 의지해 걸어 나아갔다. 아무리 걸어도 내가 아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가려면 여기에 어제까지 있었던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내리막길뿐이었다. 그래도 걸었다. 방법이 없으니까. 어느 정도 걷자 가로등의 길은 끊기고 없었다. 순간 기겁해 뒤를 돌아봤지만, 거기엔 안개뿐이었다. 가슴속에 벌통이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무진장 떨리는 동시에 아팠다. 

 당장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이내 재빠르게 뛰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부딪힐까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딪힌 것을 통해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내가 체력에 받혀 숨을 헉헉 내쉬는데, 앞에 뭔가 느껴져 봤더니 눈앞에 밝은 불빛이 보였다. 대강 보니 편의점 같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곧장 들어갔다.

 들어가자 눈에 들어온 것은 진열대와 밝은 색감의 줄이 그어진 조끼가 아니라 푹신한 소파와 유리 탁자, 사무실에서 으레 쓰이는 파티션과 책상. 그리고 그곳에 앉은 양복을 입은 노인이 있었다. 무슨 변호사 사무소 같았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노인이 내게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어서 와요.」 그러고는 몸을 땀 대신 예법만으로 적신 삶을 살아왔다는 듯, 옛 영화에 나오는 시종장처럼 우아한 손짓으로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내가 손님이 아닌 그저 길을 물으러 온 손님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탕비실로-그냥 파티션으로 구분해둔 것에 불과하니 탕비소라고 해야 할까- 걸어 들어가 잔을 준비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인스턴트커피를 꺼내 준비하는 게 아니었다. 서랍에서 부드러운 천에 잘 싸인 목갑이 나왔다. 노인이 목갑에서 꺼낸 것은 호박빛깔 액체가 담긴, 망막에 맺힌 것만으로도 제작자가 정성스레 빚어 만든 흔적이 느껴지는 유리병이었다. 

 맙소사. 빨리 말해야 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고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손님이 아닌 사람이 사업주를 마주하는 건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 짝사랑을 받는 것과 같다. 상대는 나를 보자마자 황홀한 망상에 빠지고, 그 망상에 <반드시>, <약속된> 같은 수식어를 끊임없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차곡차곡 포개어져 내게로 향한 황금길이 되지만, 내 사실 한 마디에 모두 진흙으로 변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약속을 깨버린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엔 상대가 내게 더 노력을 들이기 전에 재빨리 말해야 상대의 상처는 핥아서 낫게 할 수 있는 옅은 것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노인이 행여나 뚜껑이라도 딸까-따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황급히 말했다.

 「저기, 어르신. 저는 그냥 길 좀 여쭤보고 싶어서 온 건데요.」

 「길이요?」 노인은 나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잔과 병을 탁자로 가져왔다. 「알려줘도 어차피 필요 없을 겁니다. 우선 앉으세요.」  

 노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길이 필요가 없다니! 노인은 분명 이 시간에 나가 본 일도 없고 창밖을 본 일도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강매일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겐 장사꾼 특유의 성급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특유의 느긋한 태도는 고객에게서 조바심을 끌어내기 위해 꾸며낸 싸구려 여유도 아니었다. 눈빛에서도 그러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술을 권하는 사람을 섣불리 믿고 어울리기도 그렇다. 그렇지만 노인은 내가 앉기 전까진 앉지 않겠다는 듯 서 있었고, 결국 나는 순풍에 몸을 꺾는 갈대가 되어 그만 앉고 말았다. 내가 앉고 나서야, 노인은 그것이 예법이라는 듯 한 박자 기다린 뒤에 앉았다.

 「여기에 왔다는 건, 그 광고를 봤다는 얘기겠죠.」 노인은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아마 당황스러울 겁니다. 익숙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세상엔 안개만 남았으니까요.」  

 그 말대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의 일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광고라니?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고 있는데, 노인의 말이 생각의 흐름을 깨뜨렸다.

 「<인생대리출석사무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귀하를 위해 일할 망령은 사만 하고도 육십입니다. 귀하의 상황에 맞는 망령이 주어질 것이며…….」 

 그제야 그 문구가 뇌리에 들어 앉았다. 그 방황은 시선이 한 번 앉음으로 생긴 것이란 말인가. 이것은 괴상한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당장에 멱살이라도 잡고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공연히 따지고 싶지 않은 심정이 있었다. 왠지 모를 지독한 탈력감 때문이었다. 노인의 사무적인 말도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몇 가지 키워드는 계약 같긴 한데, 귀가 솔깃할 만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철회하고자 하면 언제든 말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뭔가 더 궁금한 사항은 없으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했다. 「요점만 말하면 뭡니까?」

 「간단히 말해, 삶에서 귀찮은 부분을 망령이 모두 해줄 거란 이야기입니다.」

 「얼마에 말입니까?」

 「돈 같은 건 받지 않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저 몸만 그것들에게 잠깐 맡길 뿐입니다.」

  노인은 탁자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얘기했다.

 「예를 들어, 일하기 싫은 순간이 왔을 때 눈만 깜빡이고 나면 일이 다 처리되는 겁니다. 당신이 잠시 의식을 망령에게 내맡기는 동안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망령이 다 해버리는 겁니다. 기억을 되짚어 뭘 어떻게 했는지 알 수도 있고요. 시험이 걱정되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망령에게 잠시 몸만 빌려주면, 마찬가지로 그 망령이 다 해결해주고, 가난해서 걱정이면 돈 벌고 싶어 하는 망령이 다 벌어다 줄 겁니다. 게다가 이 망령들은 맡은 일을 무조건 성공시킵니다. 다른 대가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범죄를 수단으로 목적을 쟁취하지도 않고 그저 정도만 걷습니다. 아무 위험도 없습니다. 다 끝나고 나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꼭 그것이 아니어도 원하는 게 무엇이든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값없이 얻는 겁니다.」 

 나는 대강 이해가 됐다. <누가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더냐!>하는 호통을 정말 이루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안개 같았던 사람의 소리가. 이제는 참으로 진실되고도 믿음직한 파트너의 목소리가 되어 내게 닿았다. 그걸 자각한 순간, 내면의 궐기와 저항은 모두 사라졌다. 내가 쏴 없앤 건지, 그들이 물러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만 들으면 좋긴 한데.」 내가 물었다. 「대가가 없다는 말은 못 믿겠군요.」

 노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노인은 목이 마른지 자신의 잔도 채우려다 멈추고 병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사실, 이렇게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과 몸의 모든 권한을 잠깐이나마 다른 것에게 내주는 게 곧 대가가 아니느냐고. 저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그렇다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내가 물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걸 마시면 됩니다.」 노인은 잔에 담긴 액체를 가리켰다. 

 나는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