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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전해다 준 이야기

솔잎사이다 2015. 8. 25. 19:02
"빰빠라빰! 빰! 빰! 기상!"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도,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도 깨우지 못한 나를 휴대전화의 알람 소리가 깨운다. 알람을 일곱시 반에 울리도록 맞추어뒀으니 지금은 일곱시 반일 것이다. 생각은 거기에 그치고, 손은 척수반사적으로 휴대전화에 뻗어나가 알람을 꺼버린다. 그런 뒤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다시 잘 바에야 뭐하러 알람을 맞췄을까. 누운 채로 흘긋 본 벽에는, 나의 새해 다짐이 크지만 멋없는 글씨로 쓴 '나의 목표'가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의욕이 충만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저걸 쓸 때만큼은 충만했다.

제대를 하고 일주일간 놀았을 때야, 죄스런 마음은 없었다. 부모님도, 나도, 그것을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포상이라고 여겼다.

스스로에게 말했었다. 딱 이주일만 놀자고. 그러나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동생의 눈빛이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노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된 것은 달력을 한 번 바꾸고, 두어번 더 종이를 넘긴 후였다.

내동 연락 않던 친구가 연락을 해서 나가서 놀았던 것인데, 그 때 친구들은 자기들 근황을 고생스럽다고 늘어놓았다. 자격증 공부부터, 식당 홀서빙 알바, 아버지 사업 장부를 대신 정리해준다는 등의 이야기인데, 나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내겐 일도 공부도 안 하고, 이어받을 사업은 커녕 기술도 없다. 내게 훈장이 될만한 삶의 조각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내 가슴에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고들어와 가득찼다.

더 이상 훈장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한 것은 다짐이었다. 그 다음이 목표 수립이고, 그 다음이 알람이었다.

공부하기 위해 예전에 사둔 자격증 시험 대비 문제집과 전공책을 책상에 두었다. 

그렇지만 삼일만 가도 다행인 나의 결심은 딱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공부하려는 마음은 책들과 함께 고스란히 책상 위에만 남아있고, 지금 이 방엔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을 모두 저만치 던져둔 나만 남았다.

나름 건실한 청년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일찍 일어나기야 하지만, 일어나봐야 컴퓨터를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곧 다시 자는지라, 딱히 일찍 일어난 보람도 의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알람을 지우자니, 쌀 한 톨도 안 되는 나의 자존심이 말린다. 내 마음 구석에선 내일에라도 올 나의 의지를 믿는 나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만 자는 내가 솜방망이로 싸운다.

생각해보면, 나의 의지라는 것도 참 별 것 아니구나 싶다. 나의 의지란 건 한 잔의 술과 같아서, 들이키기도 쉽지만 말라버리기도 쉬운 모양이다.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요일만 확인하고 놓는다.

일요일이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일요일인걸. 모두가 쉬는 일요일인걸.

아까부터 내 귀에 계속 아기의 울음소리가 파고든다. 아마 옆집 아이일 것이다. 매일 운다. 정말 섦게. 

밤을 새며 놀다보면, 나보다 귀가 예민한 남동생이 때때로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이나 밤에 잠에서 깨어 한숨을 쉬는 것이 벽너머로 들리기도 한다. 
아이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큰소리로 우는 것 같다. 우는 중간중간 남자가 추임새처럼 욕을 넣는다. 

아무리 그래도 내겐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소음이었다. 내가 행군하면서 잤던 사람이란 건 둘째치고, 저 소리는 내가 놀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던 소리라 익숙하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린다. 잠이란 친구는 이번에도 늦는 법을 모를 것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마 폭죽이 터지겠지.'

일요일이 되면 항상 집 근처에서 누군가가 폭죽을 터뜨린다. 대부분 밤에 터뜨리는데, 소리만 듣고 있어도 가슴 한 구석에서 행복이 퐁퐁 터지는 것만 같다. 그것은 내 골방 생활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터뜨리는 폭죽은 딱히 터지는 걸 보러나가지도 않지만, 터지는 소리와 매캐한 지린내는 그대로 전해져온다. 모르긴 몰라도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은 분명 즐거운 마음과 행복의 정서를 담아 터뜨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할리가 없을 테니까.

감긴 눈꺼풀로부터 전해지는 무겁고도 나른한 졸음을 음미하며 내게 다독였다.

'오늘은 글렀고, 내일부터 힘내자.'

"에이, 씨팔!"

잠에 막 빠지려는 찰나, 옆집에서 남자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쿵쿵 걷는 소리가 났다. 그 진동은 바닥을 타고 등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 진동은 이내 멈추었고, 곧 가죽 부대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내리치는 소리가 났을 때, 발정난 고양이의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두어번 나더니 멈췄고, 내리치는 소리는 몇 번인가 더 이어지다 끊겼다.

약간의 진동이 있은 후, 천을 거칠게 잡아 당기는 소리가 났다.

침묵.  

굳이 머리로 판단하려하지 않아도 상황이 머릿 속에서 그려졌다. 머릿 속에서부터 통제할 수 없는 발작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본능이 내게 절대 소리를 내지 말라고 지시한다.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숫자 세 개만 누르고, 통화하기만 하면 된다. 통화하기만.

하지만 나는 숫자를 누르지 못 했다.

두려웠다. 뭐가 두려운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두려웠다.

손가락이 버튼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창문 너머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시발."

남자의 대꾸가 있은 후, 얼마간 아무런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과는 달리, 긴장을 놓고 전화를 다시 베개 옆에 놓았다. 아까의 대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 침묵은 사람의 긴장을 탁 푸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이 세게 터져나왔다. 나는 아까보다도 더욱 놀랐다. 

나의 몸이 어떤 몸짓을 하려는 순간, 몸은 빳빳이 굳어 움직여지질 않았다. 본능적인 움직임조차 틀어막는, 목을 잡죄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조용히 해! 이 여편네야!"

남자의 고함에도 여자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왜! 왜!"

"이런 씨팔년이!"

둔탁한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쿵 하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흐른다. 비명 소리는 멈췄지만, 곧 곡소리가 그 자리를 메웠다. 그 소리는 옆쪽으로 움직이더니, 곧 크고 또렷해졌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우리 애기 살려줘요! 우리 애기 살려줘요!"   

그 소리는 점점 집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몇 분이나 흘렀을까. 순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쿵쿵 대는 소리가 길을 타고 오는 것이 들린다. 그 소리는 옆집에 들어가고야 멈췄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손들어! 아니, 당장 일어나!"

남자의 툴툴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못 들었지만, 내 귀엔 '아, 시발. 잠 좀 잡시다.'라고 들렸다.

쿵.

무언가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속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몇 차례의 진동과 욕설이 있은 후, 그 진동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침묵.

그제야 내 목에서부터 힘이 풀리고, 나는 소리내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몇 분이 지나고, 숨을 헐떡이는 것을 멈춘 나는 일어나서 무언가 하려했으나, 할 수 없었다. 

머릿 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누운 채로 있던 나는 잠이 들었고, 언제나처럼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 날은 폭죽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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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에 게시.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81720&s_no=10572139&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614362


처음으로 반응을 얻은 글이라 특히 마음에 남는다.


그 덕에 쓸 용기를 얻었으니, 정말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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