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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단편 (14)
전자나룻배
그렇다면 어째서? 의문을 품을 찰나, 순간 눈 앞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앗." 눈을 깜빡이니, 따뜻한 빛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물냄새가 나를 맞아주었다. 돌아온 것이다. 햇볕이 곧장 내리쬐는 바위에 앉은 그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까르르 웃고있었다. 얼떨떨해져 멍청히 선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그녀는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 내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동작이어서 감탄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재밌었죠?" "아, 네...." "그럼 다음엔 뭘 하고 놀까요?" "글쎄요...." 그것이 그녀 나름의 놀이였다면, 글쎄. 정말 글쎄다. 나로썬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배꼽시계가 울렸다. 11시 50분이 되었다는 신호다. 나름 근무조건..
간밤의 꿈에 적셔진 태양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생각을 깨운다. 나는 잠에 취한 걸까, 꿈에 취한 걸까. 아무래도 꿈은 아닐 것이다. 그래. 꿈은 아닐 것이다.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버스에 오르면, 나는 창가에 앉는다. 운이 좋은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나오는 정거장이 주택가와 멀어서 그런 것뿐. 앉아서 잠을 쫓아내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비눗물과 함께 씻겨내려 간 줄 알았던 생각들이 시야를 가린다. 그건 입사 기념으로 기울였던 술잔이기도 했고, 거절의 말이 담긴 분홍색 편지지이기도 했고, 플라스틱 방패를 엷게 비추는 촛불이기도 했고, 어머니의 손에 걸린 동전보다 작은 손가락이기도 했다. 그 궤적들은 멋대로 범람하여 땅을 덮는 강물과 같은 것이어서, 생각의 물꼬를 돌려도 물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써 눈으..
햇빛이 머문 자리에 달빛이 앉는 것처럼, 낮의 분주한 발자국이 아득한 시간 너머로 사라진 밤의 거리엔 저마다의 발이 채우고 섰다. 치킨집 앞에서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사람들, 윤락업소 앞을 지나가며 책을 읽는 청년, 서점 앞에서 빵을 씹는 사람, 인도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 차도에 쓰러져 자는 사람. 그것이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여 빛을 내는 가로등이라 하여도, 빛을 내지 않는다 말할 순 없다. 그래. 그럴 순 없다. 발을 멈추고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구부정한 목 앞에서 책을 치우면 내 목은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사람에게 조아리는 목이 될 것 같아서. 황급히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내 시야에서 희고 반드르르한 그녀를 빼앗고 누런 바닥을 주었다. 책은 ..
국경을 넘으면 시야에 담기는 풍광이 타국의 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는 것처럼, 산천초목을 품던 망막이 서서히 도시 건물의 반사광으로 물들어 갔다. 주름진 눈을 연해 꿈뻑거리는 박 여사나, 틀니가 잘 맞질 않아 소처럼 우물거리길 반복하는 김 씨나, 햇볕에도 몸이 데워지질 않아 목두리를 꼭 끌어안은 이 씨. 차내에 맴도는 여러 감정은, 우리 나잇대 사람들이 으레 풍기는 체취보다도 진해서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시내에 있는 큰 병원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에서 새로이 개발한 인체용 상온핵융합로를 몸에 부착하기 위해서이다. 쇠고기에 칼질하는 것도 익숙잖은 우리가 자기 몸에 칼질한다는 건 당연히 거북스러운 일이다만, 국가에서 의료비부터 시작해 손주들 교육비까지 다 대주고, 행여 일이..
"다시 한 번 말해봐요." "어쨌건 이걸 해체해야 합니다." "아니, 오케이 오케이 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이걸 뜯어내겠다고 그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쨌건 그렇습니다." 태양은 볕을 내리고, 시청은 고집불통 공무원을 내려주어 나 같은 서민에게서 땀을 죽죽 짜내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땀이 후두두 떨어지는 것이 물 부족 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무원과 삼십 분 넘게 실갱이를 벌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걸 고치는 걸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공무원의 일은 내 일감을 없애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런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나. 미치겠네." 내가 말했다. "이거 한 번 읽어 봐요. 뭐라고 써있나." 은빛 라벨엔 '잉여풍력재처리설비'라는 글자가..
상쾌하고도 즐거운 휴일 아침. 하지만 나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반찬이 형편없는 탓도 아니고, 집이 나보다 숨을 잘 쉬는 탓에 생긴 감기 탓도 아니고, 잠이 덜 깨어 입맛이 없는 탓도 아니다. 반찬 모두가 비명을 질러대기 때문이다. 장조림과 배추김치,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이 전부인 간소한 밥상. 아까의 비명은 그치고 밥상은 고요했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밥알을 건드리자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얼굴 없는 밥알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비명에, 결국 나는 밥상을 신문지로 대강 덮어두었다. 그래도 비명은 여전히 귓속을 파고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고향 집에 내려가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갈비를 구워주셨는데, 옆집에서 송아지가 어..
"다 됐다." 계의진은 폭약 뭉치에 전파를 수신할 부품을 연결했다. 건전지 넷을 꽂아두었으니 적어도 48시간은 갈 것이다. 작전 시간의 네 배. 안심이다. 이제 언제든 격발기를 누르기만 하면 비상시에 쓰는 이 발전기 또한 산산히 부숴질 것이다. 계의진은 이런 중요한 시설에 CCTV를 단 하나도 설치해두지 않는, 빡빡하면서도 은근히 허술한 이 나라 보안에 이번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다 때가 되면 터뜨리는 것이다. 이번 작전에서 계의진은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공개수배란이 바뀌는 순간 터뜨리기만 하면 된다. 경찰이 설치한 텔레비전이 거리 곳곳에 설치된 것이 이 나라 정권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공개수배란에 불순분자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기에 대통령 얼굴은 몰라도 불순분자 얼굴은 ..
"자네, 먼지가 묻었군." 나는 말 없이 옷을 털었다. 노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내 업무 수첩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중간중간 펜으로 수첩을 긋는다. 지금은 밑줄을 그어 주고 있군.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선이지. 손이 한 군데 멈춰서 움직인다. 이건 우아한 싸인을 해주는 것이다. 노인은 수첩에 종이를 끼워 내게 주었다. "이제 시작하게. 현장에 5분 늦게 도착하는 거 잊지 말고." "예." 그러고선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게 눈길을 더 주지 않고 무언가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번화가로 나왔다. 쪽지에 적힌 숫자는 1044. 장소는 카페 앞 신호등. 지금이 10시 37분이니까, 좀 빨리 온 셈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속 장소에서 떨어져 있다가, 5분 지나서 도착해 일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