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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기타

별무늬 베개

솔잎사이다 2015. 8. 25. 18:53

 선풍기 바람조차 미지근해지는 방. 그곳은 마치 거인의 입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온기와 불쾌함이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베란다로 나왔다. 밤바람은 단풍나무가 만족감에 몸을 떨 때까지 애무하다, 내게로 와 닿았다. 저녁을 거른 모기들이 다리에 달라붙어 피를 쪽쪽 빨아대긴 하지만, 나온 보람이 있다고 느껴졌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별들로도 채우지 못한 자신의 빈 곳을, 사람의 시선으로 채우고 싶어하는 것인지, 자신을 고혹적인 색으로 물들이고서 자신을 채워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의 눈이 한창 밤의 자태를 즐기고 있을 때, 희미하고도 곧은 은빛 직선이 하늘 한 편에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척수 반사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내었다. 소원을 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딱히 빌 소원도 없었지만, '소원을 빌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나는 그냥 시원한 공기와 밤하늘 그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그때, 하늘에서 여러 개의 직선이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은 반짝이는 선으로 가득 찰 것만 같았다. 
 '맞아, 오늘은 유성우가 내린다고 했지.' 
 나는 빌만한 소리를 머릿속 창고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빌만한 것이 없었다.
 '부자가 됐으면.', '뭔가 끝내주는 상이나 탔으면.',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나의 소원이라는 것들은 안갯속의 불빛만큼이나 막연하고 흐릿한 것들이었다.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욕망을 가졌던 순간은, 저 별똥별이 지나가는 순간만큼이나 짧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간절함이 없는 소원은 듣는 사람도, 가진 사람도 실망케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유성우를 보다 말고 방 안으로 향했다.
 "에이, 그냥 시원하게 잤으면 좋겠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좋은 꿈 꾸면서."
 툭.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방안에서.
 소리의 근원은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방 한가운데에, 아직 끄지 않은 텔레비전의 불빛을 받는, 단정히 눕혀 있는 물체가 보였다.
 베개였다. 
 파란 바탕에, 샛노란 별무늬가 가득한, 예쁜 별 베개. 
 재봉 자국 하나 없는 겉감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질로 되어 있었고, 옆으로는 상아색 플라스틱으로 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전자식 다이얼과, '동전을 넣어주세요.'라고 공손한 말씨로 적힌 안내문이 적힌 동전 투입구와, '지폐 투입.'이라고 적힌 지폐 투입구. 게다가, 분명 전기로 작동되는 장비 같은데, 여기저기 살펴봐도 배터리 넣는 곳도, 나사 자국도 없었다.   
 '웬 베개지?'
 아까의 소리는 누가 내 방 안으로 던졌던 걸까?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만한 물체를 밖에서 내 방으로 던졌다면, 내가 못 볼 리가 없다.
 '그럼 현관인가?'
 현관 문으로 걸어가 살펴보았다. 
 잠겨있다. 굳게. 만약 누가 열었다면, 옆집에서 알람으로 쓰는-실은 그 소리로 깨어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지만.- 이 낡은 문이 조용히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뭘까. 이 베개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 
 무심코 베개를 콕콕 찔렀다. 나는 종종 부드러운 물건을 두고 '마시멜로 같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베개는 정말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고 폭신폭신했다. 게다가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아까의 의문과 불안은 어느새 베개에 녹아 사라졌다.
 "그런데 이 구멍은 대체 뭐지?"
 돈을 넣는 곳임에는 분명한데, 세상에 동전을 넣는 베개가 어디 있던가. 베갯잇 사이에 비상금을 숨겨두는 건 봤어도, 이렇게 당당히 돈을 요구하는 베개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냥 돈을 넣기로 했다. 얼마나 넣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저 베개에 돈을 넣고 자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텔레비전 옆에 둔 지갑을 가져왔다. 
 1만 7천8백 원.
 시험 삼아 5백 원 동전 하나를 넣어보았다. 
 삐리릭.
 전자 기기 특유의 소리. 전자 다이얼에 불이 들어왔다.
 다이얼 부분을 자세히 보니, 위에 '시'이라고 적혀있었다. 요는 입력한 만큼 작동한다는 뜻일 게다.
 나는 8을 누르고 확인을 눌렀다.
 삐리릭.
 다시 맑은 소리가 나더니, 위이잉 하는 부드러운 작동음이 들렸다.
 작동했으리라 믿고,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큼의 시원함이 머리와 혈관을 타고 온몸을 훑는다. 
 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톡톡.
 나무 테이블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주문하신 아이스티 나왔습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내 앞에 잔을 두었다. 나는 해변에 있는, 야자수로 엮어 만든 카페에 앉아있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아이스티를 단숨에 들이켰다.
 카페를 나서자 강렬한 햇빛이 나를 반겼다. 포근한 따스함.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모래 조각하는 사람이나, 모래찜질하는 연인, 바나나보트를 타는 사람. 
 사람들은 해변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들어 내 몸을 보니, 나는 샌달에 트렁크 수영복 한 장 입은 것이 전부였다. 
 '내가 이렇게 대담한 사람이었던가?'
 평소라면 부끄러워 시도도 않았을 짓을 태연히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닷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거니는 것도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원. 이런 건 내 성미에 안 맞는데.'
 해변 산책하는 것도 물렸다. 나는 그냥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냥 앉아서 해변에서 사람 노는 것이나 구경할 생각이었다. 항상 바다로 휴가를 가면 이렇게 될 것 같아 가지 않았는데,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음료수나 마셔야겠다."
 "주문하신 아이스티 나왔습니다."
 자판기를 찾아가려는 순간, 아까 그 종업원이 쟁반에 담긴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어? 어, 어. 고마워요."
 종업원은 내가 음료를 받아들자 곧바로 바쁜 듯 가게로 달려간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쨌건 나는 음료를 마시면서 구경했다. 좀 보다 보니 바나나 보트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거나 탈까."
 "자, 꽉 잡으세요!"
 "네!"
 내 앞의 세 명과 뒤에 앉은 한 명이 대답했다. 나는 바나나 보트의 끈을 꽉 붙잡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바나나 보트로 온 것이었다! 
 제트스키에 탄 중년의 남자가 외치자마자 바나나 보트는 수면 위를 빠르게 달렸다. 거기에 탄 모두가 쾌감으로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내리고 난 후에도 한동안 얼떨떨해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꿈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걷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소라고둥. 나는 고둥을 주웠다. 나는 예전부터 고둥을 귀에 대고 소리를 듣고 싶었다. 바다에 갈 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걸 해보지 못한 게 아쉬웠었다.
 고둥에선 아주 맑고도 깊은. 마음을 청아하게 해주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기대하며, 고둥에 귀를 갖다 댔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 소리에 눈이 떠졌다. 먼지 낀 형광등과 곰팡이가 슨 천장이 보였다.
 "음, 벌써 끝났구만."
 그것은 모두 꿈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알람 소리가 꺼졌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는데,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몸에선 바다 내음이 났고, 다리엔 마른 모래가 엉겨 붙어 있던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에 베개를 쥐고 말했다.
 "너 정말 굉장한 녀석이구나!"
 5백 원이 그 정도라니! 무척 흥분되었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았다. 
 11:39 (토).
 어차피 월요일 출근이다.
 나는 지갑에서 돈이란 돈은 모두 꺼내 베개에 넣었다.
 삐비빅.
 돈을 넣자 다이얼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24를 누르고,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서서히 눈이 감겼다.
 펑. 펑.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불꽃놀이다. 수많은 불꽃이 하늘로 올라 터졌다. 가지각색의 불꽃은 곧 하늘에 박혀 그 색 그대로의 별이 되었다.
 "침대 축제 시작합니다!" 
 잠옷을 입은 남자가 날아다니며 외쳤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보았다. 건물 몇 개보다도 더 큰 침대에서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만세!"
 사람들은 기쁜 듯 소리치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 또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사람들을 안고 있던 침대는 터지더니, 많은 솜덩이가 되었다. 그 솜덩이에선 나무 막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니, 사람들에게 날아가 안겼다. 솜을 한 입 베어 물자 데운 설탕 특유의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솜사탕이다!"
 "솜사탕!"
 하늘을 나는 사람들은 솜사탕을 버렸다. 그러더니 그것은 초콜릿 소파가 되어 사람들을 태우고 날았다. 소파에서 내뿜어진 불똥은 폭죽이 되어, 온 하늘을 불꽃으로 메웠다. 
 아래를 보니 크고 작은 건물들도 어느샌가 솜사탕을 쥐고 춤을 추고 있었다. 건물들이 쥐고 있던 솜사탕은 횃불로 변했다. 건물들은 횃불을 공터에 일제히 던졌다. 던져진 횃불들은 거대한 모닥불이 되어 타올랐다. 건물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초콜릿을 뿜어 자신의 몸을 윤이 나는 갈색으로 물들이고서, 몸 여기저기를 하얀 문양으로 채운 후, 캠프파이어 주변을 돌며 춤을 췄다. 
 내 옆엔 어느새 전철이 날고 있었다. 전철이 내게 말했다.
 "내 야상곡을 들려드리지!"
 전철은 자신의 객차를 모두 분리하더니, 그 자신이 하늘에 뜬 계단이 되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층계를 밟을 때마다 아름다운 실로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건물들의 춤은 격해졌다. 모닥불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건물들은 모닥불에 뛰어든다. 뒤이어 가로등이 뛰어들었고,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던 소파들도 뛰어들었고, 산들이 뛰어들었고, 땅도 모닥불에 빨려 들어갔다. 공중을 떠다니는 사람들 아래엔 모닥불과 물만이 있었다.
 물에 뜬 모닥불은 이내 사그라들더니 태양이 되었다. 물은 하늘이 되었다. 
 "모두 강강술래!"
 "강강술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내 시야에 닿는 밤하늘과 태양은 곧 섞였다. 
 모든 것이 섞인 세계는 끝없이 펼쳐진 구름이 되었다. 태양은 없어도 빛은 있었다.
 나는 손에 든 기관총을 하늘을 향해 쏴 갈겼다. 총알들은 쏘는 족족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들은 곧 떨어져 구름에 안착했다. 구름은 아이를 삼키고, 불덩이들을 하늘 위로 토해내었다. 불덩이 하나하나가 태양이 되었다. 
 내가 손뼉을 치자 구름은 깔끔한 도시로 변했다. 태양들은 한데 뭉쳐 커다란 달이 되었다. 거리는 걸어 다니는 휴대전화들이 가득 채웠다. 나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외쳤다.
 "다들 힘내!"
 휴대전화들이 응답한다.
 "고마워!"
 그 응답에 휴대전화들은 하늘로 올라가 터졌다. 쏟아진 파편들은 하늘에 멈춰있더니 모빌로 변했다. 건물들은 몸 곳곳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거인이 되어 걸어 다녔다. 달이 광채를 뿜어내더니 태양이 되었다. 거인들이 모빌을 집자, 모빌은 만화책이 되었다. 만화책은 곧 분해되어 땅으로 흩어졌다. 나는 종이가 일으키는 풍압에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종이 중 하나를 집어 타고 날았다. 종이에 닿은 거인들은 춤을 추는 동물 인형이 되었다. 인형들의 입과 항문에서 사람이 쏟아져나왔다. 그 사람들은 나처럼 종이를 잡고 마음껏 날아다녔다. 종이는 닭다리 튀김이 되었다. 마침 맑은 하늘에선 칠리소스 비가 내리던 참이다. 나는 튀김을 먹는 대신, 튀김을 잡고 봉춤을 추었다. 튀김은 담배를 주둥이에 문 술병이 되었다. 나는 술병을 발로 차 하늘로 띄워 보냈다.
 뽕.
 술병은 주둥이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뿜어내면서 하늘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거품들은 동전이 되어 거리에 떨어졌다. 그리고 동전의 급류가 도시 곳곳에 퍼졌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동전 해일에 뛰어들었다. 모두 떠내려가면서도 헤엄치며 즐겼다. 어떤 사람은 지폐 보드를 타며 파도를 즐겼다.
 내 눈앞엔 산 대신 거대한 이불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이불이 뻐끔거리며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삼켜댔다. 동전을 양껏 머금은 이불이 호텔로 변했다.
 여전히 미끄러져 가는 나를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환대했다. 나는 그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호텔의 문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프론트에 있는 이불에 쏙 들어갔다.
 삐삐삐삐.
 몸을 일으키자 알람 소리가 꺼졌다.  
 "와하하하!"
 나는 베개를 껴안았다. 베개는 여전히 시원했다.
 "정말 즐거웠어! 고마워!"
 베개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그 꿈을 남에게 나눠줄 수 없어 아쉬울 정도야!"
 그 꿈은 설명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걸 남들에게 말로만 전한다면, 십중팔구 마약을 했느냐고 물을 것이 분명했다.
 꿈에는 감촉이 있었다. 꿈의 감촉이란 것은 햇살의 온기를 충분히 머금어 먼지 내음을 내는 이불 같은 것이어서, 그 감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선 아직도 그 꿈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그 꿈에 취했는지 미소가 거두어지지 않았다. 꿈꾸는 내내 행복했지만, 그 행복을 나눌 수가 없다니. 정말 아쉬운 노릇이다.
 "정말 행복해! 다 네 덕이야!"
 누군가 베개에 입을 맞추며 웃는 나를 본다면 필시 미쳤다고 했겠지만, 내게 자각은 없었다.
 "좋아. 다음은 내게 무슨 꿈을 꾸게 해줄 거야?"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지갑을 주웠다. 지갑엔 돈이 없었다. 자기 전에 다 넣었으니, 당연하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돈 생기면 꼭 줄 테니까, 그땐 꼭 좋은 꿈 꾸게 해줘야 한다. 알았지?"
 베개에 머리를 뉘인 나는 베개에 입을 맞췄다.
 쪽.
 "잘 자. 너도 내 꿈 꿔."  
 시원해서일까. 이번에도 역시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잠깐, 일어나주실래요?"
 속삭임. 곱고 앳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나는 눈을 떴다. 
 "아."
 그리고 탄성을 내었다. 밤하늘이었다. 사방이 밤하늘이었다. 나는 밤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 언젠가 야시경으로 봤던 밤하늘도 이만큼이나 많은 별을 품고 있지 않았다. 
 "일어나셨나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 거기엔 소녀가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별무늬 옷을 입은 소녀가.
 나는 일어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내게 안겼다.
 "정말 고마워요."  
 소녀는 내 가슴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나서 우는 소녀도 소녀지만, 면직물 너머의 포근하고도 봉긋한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벼댔다.
 "그동안 저를 만난 사람들은."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저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찢어 버렸어요."
 펑펑 울던 소녀는 눈물이 멎자,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절 칭찬해주신 것도. 절 사랑해주신 것도. 당신이 처음이에요."
 나에게서 떨어진 소녀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녀의 입술은 참 시원했다.
 "고마워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의문에 소녀는 '자기. 자기. 나의 사랑스러운 자기.'라고 중얼거릴 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요?"
 그녀는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삐삐삐삐.
 전에도 그랬듯, 내가 일어서자 알람이 꺼졌다. 
 '대체 뭐였지?'
 돈을 넣지 않아도 좋은 꿈을 꾸게 해준다니. 나는 이 베개에 대해 대충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5:20 (월).
 벌써 출근 시간이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곤 일터로 향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친구를 찾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너 오늘 얼굴 왜 그러냐?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그게 말이지."
 나는 그동안 겪었던 신비한 체험을 설명해주었다. 별무늬 옷을 입은 그녀의 이야기는 제하고.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친구는, 내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너 화공과 나왔다더니, 그새 마약 만들어 피웠냐?"
 "아냐, 인마. 진짜래도? 정 못 믿겠으면 오늘 빌려줄게."
 일이 파하고, 나는 집에서 별무늬 베개를 들고 친구 집에 찾아갔다.
 "이게 진짜 쥑이는 꿈을 꾸게 해준다 이거지?"
 "그래. 정말이래도."
 "돈을 다 넣었더니, 그 뭐시냐. 마약빤 것 같은."
 친구의 말을 자르고 정정해주었다.
 "마약이 아니라 도원경."
 "그거나, 그거나. 어쨌건 돈 많이 넣을수록 좋은 거네?"
 "음. 아마 그럴 거야."
 "잠도 바로 오고?"
 "그렇지. 안 넣어도 잠은 바로 와."
 고개를 끄덕인 친구는 장롱 위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보드게임 상자였다. 나는 말했다.
 "그거 둘이서 하면 재미없어."
 친구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돈이건 상관없지?"
 "어,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랐다. 현찰만 받아? 베개님은 가짜 돈을 싫어하셔? 
 "속이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베개라지만.'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친구는 보드게임 돈을 베개에 꾸역꾸역 넣고 있었다.
 "뭐, 괜찮아. 어차피 베갠데 뭐."
 무척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말리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시간 설정까지 마친 친구는 잘 준비를 했다.
 "그럼 난 잔다. 너도 알아서 자고."
 "그, 그래. 잘 자라."
 친구 또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나는 밖에서 담배 한 갑을 모두 태우고, 불안감과 더위랑 씨름하다 겨우 잠이 들었다.
 내가 일어났을 땐, 친구는 방에 없었다. 별무늬 베개만 덩그러니 남아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베개를 집고 집을 나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내 집에 갖다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얜 어디 간 거야? 잠도 오래자는 녀석이."
 "우리 그룹 어딨어! 김기사 어딨어! 박비서는 또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놀라서 밖에 나가보니 친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뭐하는 거야?"
 친구는 나를 보더니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아직 살아 있었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친구는 내 얼굴에 삿대질해댔다.
 "그리고. 왜, 왜 그렇게 젊은 얼굴이야?"
 "무슨 소리야. 늙은 적도 없구만."
 친구는 다시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지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고! 왜 전부 사라진 거야!"
 그리고 자기 집을 보더니 절규 섞인 비명을 질렀다.
 "내, 내가 이 거지꼴을 면하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러더니 돌을 주워 집에 마구 던졌다. 친구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진정해!" 
 친구는 나를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쿠!"
 친구는 나를 확 떠밀었다. 친구는 씩씩거리며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아픈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일어나자, 친구는 곧장 어디론가 달려나갔다.
 "야, 야!"
 나도 따라 달렸다. 친구는 지치지도 않는지, 뛰면서도 무언가 중얼댔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대체 뭐야! 설명 좀 해봐!"
 "닥쳐!"
 한창 달리던 친구가 멈춘 곳은 차도였다. 친구는 차도를 살피다가.
 뛰어들었다.
 "안 돼!"
 친구가 버스에 부딪히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버스 안에서부터 비명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구급차를 부르는 것도, 친구의 몸을 살피는 것도, 그 무엇도. 
 단지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면, 집에 가고 싶다는 것. 가서 빨리 자야 한다는 것.  
 나는 팔에 베개를 낀 채, 터덜터덜 걸어 내 집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나는 그 베개를 벴다. 베개가 오늘도 시원했다. 나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내가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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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에 게재.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readers&no=21142&s_no=2114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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